[오늘의 메뉴] 식사 알림장
2023년 4월 26일 수요일 - 가정의 날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한 계획을 세웠지만 각본대로 실천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실은 어제가 그러했다. 상쾌한 마음으로 찐득하게 붙어있던 업무를 조금이나마 일찍 떼어낼 수 있었다. 진행률로 계산하면 90%에 이르는 수준이었다. 신나게 저녁을 먹고 다시 한번 차근차근 살펴봤다. 늘 그러하지만 한 가지 업무에 몰입을 하면 스스로 만든 오류를 진실로 보는 경우가 있다. 때때로 그 오류는 작성자의 눈을 피해 도망 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점심 또는 저녁식사 시간은 작성한 문서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필터를 설치하는 시간으로 여긴다. 오랜 시간 보던 내용이기에 필터링에 최적화되도록 간격을 더 길게 두었다. 밥도 먹고 이제 1시간 안으로 종료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감추지 못한 채 문서 확인을 시작했다. "끝내볼까... 오케이... 오케이... 다 들어있고...... 응? 뭐야? 이게 왜 빠져있냐".
바쁠수록 사람이 정신을 살짝 내려놓는다고 하지 않던가. 저녁시간이 유독 즐거웠는데 그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이빨 빠진 서류가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십여 초간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아무 말로 이을 수 없었다. 후.... 흐릿해지는 멘털을 붙잡으려 저녁시간 이후로 먹지 않는 믹스커피를 택했다. 호로롭하는 소리에 아주 뜨거운 커피는 어느새 입으로 조금씩 흘러들어왔다. "아... 어떡하나" 오늘은 내가 마지막 주자가 아니길 바랐는데 사무실에 남은 마지막 주자가 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서류 전체 구성이 흔들릴 정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진전이 없어 보이는 한 가지 일을 붙잡고 며칠을 고생해서 만든 서류. 다행히 작은 실수지만 온몸을 스며드는 서늘한 이 기분과 허무함은 여전히 적응하기 어렵다.
이런 순간이 오면 과거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회사를 다니기 전. 그곳에서는 이보다 조금 더한 울렁이는 기분을 자주 느꼈다. 퇴사를 결심한 막판에는 혈압이 뚝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철렁하는 경험을 했다면 그 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날은 밤 12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결재를 거부당하고 밖에서 종이 몇 장을 손에 쥔 채로 퇴근하는 팀장의 차를 보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 그러곤 나지막이 두 글자가 툭 튀어나왔다. 사직서도 아니고 "못하겠습니다"라는 말도 아니었다.
쉬자.
어렵사리 들어간 직장이지만 장점이 많은 회사였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다녔었다. 그곳에서 5년의 시간을 보내며 고민하고 신경 쓰던 부분을 내려놓으니 오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내 시간이 허비되는구나 하는 생각에서 세상엔 이런 일도 있지 하는 생각. 나와 네가 아닌 누군가가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 상황을 보고 있었다. 그땐 아무도 날 도와주거나 격려해 주지 않았다. 그저 언제까지 완료하라는 부담스러운 약속만 거듭될 뿐이었다. 그 일을 못하면 다른 일도 못한다는 생각으로 어두운 생각의 뿌리가 깊게 자리 잡혀 있었다. 회사는 좋지만 누구에게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정해져 있다는 듯 이랬다. "나도 매일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올라왔어". 진한 라테향기. 개인적으로 라테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 표현방식만 조금 바꾸면 분위기가 사뭇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더 했어"라는 말 보다 "여기 일이 그러더라". 본인을 투영하지 않고 조금의 객관적인 표현을 했다면.
이제는 힘들다고 어렵다고 쉽사리 회사를 관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다행인 건 이곳 나의 팀은 뒤쳐지는 인원이 생기지 않도록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마인드가 강하다. 팀원 중 누군가 어려움에 처에 있으면 업무를 나눈다. 업무의 품앗이가 잘 되고 있다. 그렇다고 그걸 믿고 업무를 대충 하면 오히려 견디기가 더 어려운 구조다.
누락된 내용을 채워 넣고 오늘 오전 팀장님께 2번의 검토를 받은 후에야 업무가 종료됐다. 다른 업무가 꼬리를 물고 있지만 앞선 업무보다는 신선하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무엇보다 약속을 지키려는 나의 모습에서 위안을 삼았다. 그럼 이제 밥을 먹어볼까. 오늘의 점심은 순댓국이었다. 사진을 찍지 못해 아차 했지만 아주 맛있게 먹었다. 특히나 오늘은 어찌나 바람이 강하게 불던지 아주 쌀쌀했다. 추웠다.
새로운 업무를 시작하는데 이 녀석도 만만치 않은 녀석이었다. 그래도 지루함을 느끼지는 못했으니 일단은 하나씩 진행했다. 어느새 저녁 시간이었다.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오늘. 저녁을 먹으러 쌩하고 달려갔다.
오늘 저녁의 시작을 알리는 맛은 애호박 전이었다. 애호박값이 높다는 아내의 말을 들어서 그런지 가장 먼저 젓가락이 갔다. 달다. 정말 달았다. 채소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그 당도가 애호박 전에 그대로 담겨있었다. 과거엔 육수를 칭송했지만 지금은 채수도 아주 좋아한다. 오늘은 돈가스도 뭔가 달랐다. 직접 만든 돈가스는 아니지만 새로운 돈가스였다. 배추김치가 오늘따라 산미가 느껴지는 맛이 강했다. 돈가스와 함께 먹으니 웬걸. 조합이 대단했다. 돈가스집에서 김치를 조각내서 주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었나 보다. 여기에 밥을 와앙.
특별히 오늘은 수프까지 함께 가져왔다. 경양식집에서 돈가스를 먹으면 수프가 먼저 나오지 않던가. 그 추억을 떠올리며 수프도 예쁘장하게 담았다. 컵라면의 물 붓는 선이 있듯. 수프도 호로록 먹고 밥도 먹고. 새로운 일에 진격을 하기 위해 충분한 에너지를 섭취한다. 그리고 마지막 토마토 두 개는 언제가 기분 좋은 마무리를 만들어준다.
가정의 날. 오늘은 둘째 귀염둥이와 목욕하는 날이다. 귀염둥이랑 뽀글뽀글 씻고 이야기꽃을 피우리.
<오늘의 Pick!>
- 달달한 애호박 전, 두툼! 바삭! 돈가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