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도 적당히 불고 햇볕도 적당한 10월 어느 날. 변화 없이 비슷한 주말이겠거니 어떻게 하루를 보낼까 생각했다. 어딘가 먼 곳으로 가기엔 몸이 따라주질 않는 날. 마침 동네 근처 공원에선 제법 큰 축제가 열렸다. 수많은 주민분들이 공원을 가득 채웠고 무대공연장과 참여활동이 가능한 작은 부스마다 사람들로 붐볐다. 아내는 간식을 챙겼다. 나들이 가기 좋은 날이기에 그냥 넘길 수 없다 싶었고 동네 근처 공원에서 하는 축제다 보니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다. 적당한 자리에 돗자리를 펴고 아이들은 뛰어놀기 바빴다. 아내는 동네에 아는 엄마들과 만나 대화의 꽃을 피웠다. 내 곁엔 아무도 없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로움에 마음이 들떴다.
점심은 푸드트럭에서 사 온 분식과 집에서 챙겨 온 간식으로 대체했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으니 모든 게 다 맛있고 만족스러웠다. 외부에서 보면 동네에서 일어나는 작은 행사고 가족단위로 모여 앉아 쉬는 모습이 전부다. 한데 이런 순간이 내게 큰 힐링이 될 줄이야. 사실 주말이라고 마음 편히 쉬었던 적이 많지는 않다. 아이들과 즐거운 주말을 보내려고 행사, 축제, 공연 등 활동에 참여하기 바빴다. 초등학교 저학년, 유치원 또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자녀를 둔 부모라면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순수하게 자신에게 집중하기가 여의치 않다는 것을. 일요일까지 주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상당히 제한적이다. 그러니 지금과 같은 시간은 그 어떤 활동보다 기분 좋은 힐링이다.
밥도 먹었겠다 곧 둘째가 영어를 배우러 갈 시간이 됐다. 청소년 수련원에서 배우는 영어인데 둘째가 만족스러워한다. 영어를 비롯해 다른 활동도 겸하다 보니 나도 만족스러웠다. 재미있는 건 둘째 귀염둥이는 맞지 않아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어책이나 배운 것을 물어보면 맞는 것도 틀린 것도 있지만 주저하는 모습이 없어서 더 귀엽다. 틀렸다고 뭐라 할 수도 없을 만큼 밝게 말한다. 둘째와 함께 청소년 수련원으로 이동했다.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주차는 늘 어렵다. 이 날은 운 좋게 구석에 한 자리가 있었고 여유롭게 교실에 데려다줬다. 수업시간은 50분.
"재미있게 하고 와~ 이따 봐요~"
기분 좋게 인사를 하고 50분의 개인시간이 생겼다. 그토록 원하던 휴식 시간이다. 어떻게 보낼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바로 앞에 작은 산이 있다. 산책로도 잘 되어 있고 주말 아침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한 시간 정도 걷고 뛰며 산책을 하는 곳이다. 이 산에서 50분을 보내기로 했다. 아이를 보내놓고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대기시간을 보내는 학부모님이 많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서 스마트폰만 쳐다보는 일은 내게 힐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자책을 보는 것도 좋지만 이 날은 날씨가 너무 좋아서 책 보단 숲이었다.
홀로 산행이라니 내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그것도 주말 낮에 50분의 여유라니. 별일 아닌 것 같아도 내게 딱 맞는 힐링방식이라 행복했다. 붉은색과 녹색의 산책로가 보였고 발을 디디는 순간 실감 났다. 진짜 힐링은 이런 거구나. 잠시 시간은 잊고 박자에 맞춰 속도를 냈다. 어린아이들도 있고 다리가 불편하신 분들도 보였다. 작은 산책로지만 많은 사람들을 봤다. 그간 불필요하게 불평하지 않았는지 게을렀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힐링도 하고 반성도 했다. 몸도 마음도 깨끗하게 만들어지는 기분이다.
20분 정도 걸었을까 산에 있는 주요 코스 안내판이 보였다. 평소엔 막내 손을 잡고 함께 걷고 뛰어서 산 위로 올라가는 코스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나 지금은 혼자이니 지금이야 말로 궁금증을 해소할 기회였다. 전체 경로가 표시된 지도를 보고 산길이 어떻게 연결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지 시험할 수 있는 기회다. 수업이 끝나기까지 30분 정도 남았고 이 산의 크기와 산책로의 길이가 어느 정도 인지 대강 알았기 때문에 주저 없이 위로 향했다.
숲에선 숨 쉬는 것 만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눈앞에 펼쳐진 길 너머로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게 만드는 길이 정말 매력이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 비만 때문에 아빠와 등산을 정말 많이 했었다. 그렇게 싫어했고 힘들었던 등산인데 돌이켜보니 정말 많이 도움이 됐다. 정상을 앞두고 가파른 계단에 주저앉아 하늘을 보며 헐떡였다. 아빠의 손을 잡고 매달리듯 정상에 올랐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다음번 등산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산은 이렇게 말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면 꾹 참을만하다.
도심 속 가로수가 양식이라면 숲 속의 나무는 자연산이다. 딱 이맘때 느낄 수 있는 공기와 풍경은 미소 짓게 만든다. 매일 머릿속에 그린다. 눈앞에 펼쳐진 자연풍경을 보며 따듯한 혹은 시원한 차와 함께 독서를 하는 내 모습 말이다. 사람들과 웃고 공감하는 즐거움 보다 스스로 행복하기 위한 공간과 시간을 그리고 있다. 지금의 나는 그렇다. 같이 보단 혼자 있고 싶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롭다. 돌도 나무도 흙도 완전히 다르다.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에 그간 잊고 있던 '살 맛'을 찾았다는 생각까지 했다.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도 좋지만 나를 위해 온전히 시간을 보내는 게 오랜만이라 감격스러웠던 거다. 집에서 회사에서 느끼는 무언의 압박과 피로감의 뒷면이 바로 이런 건가 보다. 휴식이 필요해 쉬고 싶어 했던 나의 진심이 이런 건가 보다. 양보다 질이 좋은 휴식. 잠도 너무 많이 자면 더 피곤해지듯 휴식도 마찬가지다. 짧고 깊은 쉼이야 말로 내 삶에 필요했던 것이다.
숲과 보낸 50분. 즐거웠다. 행복했다. 이제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때다. 얘들아 아빠 왔어~. 누워서 책 볼까?.
결론 휴식도 과유불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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