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_임인년/일상

평생친구 있으신가요?

솔트리오 2022. 11. 8.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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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약직 사장님의 일화다. 이 분야에서 30년을 몸 받쳐 오셨다. 국내 대기업에서 오랜 기간 높은 자리에서 근무하셨고 해외 경험도 풍부해서 자신의 경험은 후배들을 위해 전해줘야 할 자산이라고 자부하신다. 임원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실무에 관심도 많고 적극적인 자세로 임무수행에 만전을 기한다. 그 덕분인지 실무자들은 사장님과 대화가 많아졌고 부조리한 상황들이 해결되는 경우도 간혹 생겼다. 수많은 일이 이력관리가 되는듯한 모습이었다. 내가 사회초년생일 때 처음 뵙던 팀장님께 중요한 사실을 배우고 실천하는데 노력했다. 바로 이력관리다. 짧은 시간으로는 그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없다. 6개월 정도 지나고 나면 그 진가를 조금씩 느낄 수 있다. 근거도 잘 남겨두어야 한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부지런히 관리하고 파악이 빠르도록 하나의 체계를 만들고자 노력한다. 파일 이름의 구성도 나름의 규칙을 만들어 퍼뜨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이 많아지더라도 잘 견뎌냈다. 그런 상황을 약 5년 정도 반복해서 겪다 보니 사장님의 보고 방식을 이해했고 자연스럽게 요령이 생겼다.


요령이나 방법이라 하니 떠오른 생각인데 얼마 전에 한 권의 책을 읽고 깨달은 부분이다. 하나의 방법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방법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떻게 하면 연애를 잘할까요? 어떻게 하면 말을 잘할까요와 같은 내용이다. '잘하는 방법'이라는 모호한 기준이지만 꾸준히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 들이다. 아주 단순한 접근을 하자면 연애를 잘하고 싶다면 이성을 만나야 한다.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또 찾아야 한다. 이성을 만난 후 호감을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 무엇이 있다. 방법은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찾아야 한다. 특정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은 과정 자체가 방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스스로 생각하게 되고 시간이 흘러 연애에 성공한다면 그 자체가 연애를 잘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방법의 핵심으로 다가가는 방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실천 목록을 찾는 일이다.


돌아와서 사장님의 이야기로 넘어가겠다. 몸에 익힌 요령은 다소 과한 업무보고 횟수와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이다. 이 효과는 본업무의 탄력성을 유지시켜 준다. 초창기엔 사장님 보고를 하는데 10번 이상의 반복적인 보고를 할 정도였다. 나는 이렇게 저렇게 도돌이표 같은 수정을 반복했다. 과연 그 내용들을 모두 기억하실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곧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 팀 말고도 다른 팀의 모든 상세 업무보고를 사장님이 다 챙기시느라 기억을 못 하셨다. 정말 큰 비용이 발생되거나 사장님이 관심 있는 내용이 아니면 기억하지 못하신다. 그 어떤 사람도 그렇게 많은 양의 보고 내용을 기억할 순 없을 것이다. 사장님의 업무 스타일은 보고받는 도중 생긴 의문을 즉시 해결하지 않으면 그다음 보고 회차로 넘기신다. 그래서 초반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반복적이고 비효율적인 보고의 복습이라고는 하지만 덕분에 요령이 생긴 건 확실하다. 보고 경험이 늘어날수록 팀장의 보고에도 변화가 생겼다. 다음 회차로 넘어가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선 경험을 앞세워 조금 강한 어조로 어필을 하셨고 사장님께서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수긍하셨다. 우리 팀장님은 다행히 사장님께 가장 신뢰받는 분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수렁에서 빠지는 일은 없었다. 문제는 그 후였다. 보고 시간에만 그렇고 오히려 그 신뢰로 인해 업무 중 전화를 하셔서 갑작스럽게 숙제를 주시는 경우가 늘었다. 팀장님의 깊은 한숨과 함께 우리는 자료를 만들기 위한 간단한 회의를 수시로 했다. 매주 팀장급 회의 후엔 깊은 한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회사 현실에 맞지 않는 보고 방식을 요구하셨다. 또는 요구하신 방식이 가능하더라도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조금 부족한 모습도 보여주셨다. 장거리 출장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도 갑작스럽게 부르는 게 가장 빈번했다. 정년이 지난 연세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회사 업무에 신경을 많이 쓰셨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개인적인 취미나 가정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하신 것 같았다. 진짜 워커홀릭이다. 일에 열정을 쏟고 해결하는 즐거움으로 삶의 대부분을 보내셨을 거라 예상된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공허함을 느끼시고 그 상태로 지금까지 달려오신 거라 생각한다. 경제적인 부분이라면 상위에 속하실 분인데 이 정도로 회사일에 진심인걸 보면 인생의 만족을 일에서 찾으신 건 아닐까. 항상 강조하시는 '이 분야에서 30년'. 그 정도로 집중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인생에 정답은 없지만 회사를 위해서 개인의 시간을 필사적으로 희생하는 건 내 삶과 맞지 않다. 


사장님의 계약 종료 시점이 가까워질수록 사내에서도 여러 가지 말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업무를 꼼꼼히 하는 건 좋지만 직원들의 업무 피로도와 사기저하가 생기는 점이 우려된다는 임원분들 걱정스러운 말이 새어 나왔다. 직원들에겐 필요한 보고 내용만 간단하게 받는 식으로 조정해달라는 내부의 목소리가 조금씩 크게 울려 퍼졌다. 사장님도 받아들이셨는지 매주 하던 업무보고를 격주로 바꾸셨다. 매주 순회하시던 지역 출장 횟수도 많이 줄어들었다. 말년병장과 비슷한 느낌으로 회사 내에서 사장님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씩 달라졌다.


어느 날 본부장님이 말씀하셨다.

본부장님 : 야 OO아 사장님이 나랑 평생 친구 하자고 하시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네가 나 대신 말씀 좀 해드려라.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사장님 자신의 인생을 사랑했다기보다 대기업에서 근무한 자신의 모습을 더 사랑하신 것 같았다. 회사는 우리를 평생 책임져주지 않는다. 회사 업무에 열정을 쏟아 붙는 건 멋지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게 인생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남은 인생 길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나는 이름과 글을 같이 남긴다. 내 이름은 전국에 너무 많지만 내 글은 유일하다. 내 글은 평생 친구이자 유일한 자산이다.

 

 

고생하셨습니다. 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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