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_임인년/일상

그냥 소원을 말했을 뿐인데!

솔트리오 2022. 11. 12. 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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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이 이뤄진 날이다. 이 상황은 누군가에겐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이고 또 누군가에겐 정말 꿈같은 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개천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를 이용해 퇴근하던 길이었다. 평소와 똑같이 퇴근길에 자문자답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흘러나온 생각을 중얼거리며 메모장에 적었다.

(메모장 속 상상의 상황)
본인 : 나한테 작은 소원이 있어. 별거 아닌데 한 번 마음 편히 해보고 싶어.

아내 : 소원이 뭔데?

본인 : 평일에 퇴근해서 엄마, 아빠랑 밥 한 끼 같이 먹는 가야.


차분히 적어놓은 내 바람. 밥 한 끼 같이 먹는 것을 소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부모가 되지 않았더라면 밥 한 끼 같이 먹는 소원은 생각도 못하지 않았을까. 사소하다고 생각한 일에 소원이라는 단어를 붙여주니 가슴속에서 고요하게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뜻대로 일이 되지 않거나 답답함이 쌓였을 때 작은 소망은 의외로 큰 힘이 된다. 짤막한 글로 마음을 남겨놨고 그 후로 며칠이 지났다.


아내 : 얼마 전에 어머님이랑 통화했는데 쌀 떨어지면 와서 가져가라 하셨어. 쌀통 보니까 내일 받으면 될 거 같아.

본인 : 그래? 알겠어. 차 가져가야겠네.

아내 : 오랜만에 어머님 댁에 가니까 일찍 퇴근해서 저녁 먹을 수 있음 먹고 와. 얼굴 보고 얘기도 하고. 대신 너무 늦지는 말고 애들도 씻기고 재우고 해야 하니까.

본인 : 진짜? 알겠어. 시간 되면 먹고 올게.


육아의 어려움으로 늘 정신과 체력이 고갈된 아내의 깜짝 배려에 너무나 고마웠다. 한편으론 갑자기 왜 그러는 걸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내에게 표현하진 않았다. 오랜만에 엄마, 아빠랑 같이 밥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차를 가지고 출근했다. 최근 들어 몇 차례 방전이 돼서 오늘도 또 그런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시동은 문제없이 걸렸다.


본인 : 좋았어!


방전되지 않을까 신경 쓰던 마음이 시원하게 뚫린 기분이었다. 회사 근처에 도착해 탁 트인 하늘을 볼 수 있는 나만의 공간으로 곧바로 향했다. 아침의 달과 오밀조밀 모여있는 아파트와 빌딩 그리고 사방으로 둘러싸인 멋진 산을 바라봤다. 고요한 그곳은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내게 선물한다. 사무실은 조용하고 따듯했다. 신기한 건 당일 아침 칼퇴근해 볼까 하면 꼭 무언가 일이 생긴다. 다행히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칼퇴근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퇴근 전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본인 : 지금 출발해~.

아빠 : 응 알겠어. 조심히와~. 밥은 먹었어? 지금 족발 사다 놨어.

본인 : 오 그래? 밥 먹었는데 또 먹지 뭐. 알겠어~.


다른 게 필요 없었다. 그저 반기는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기분이 좋았다. 주차를 하고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내가 이 집을 나온지도 어느새 8년이 넘었지만 내 몸이 아파트 출입문 비밀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본인 : 왔어~.

엄마 : 오랜만이네~.

아빠 : 왔냐.

동생 : 왔니~.


얼마 만에 듣는 환영인사인가. 결혼 전에 살던 우리 집이다. 집 냄새, 가구 배치, 집안 온도가 익숙했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언제나 편안함을 주는 아빠, 엄마 그리고 동생. 마음만은 옛날로 돌아갔다. 눈치 볼 것도 신경 쓸 일도 하나씩 줄어든 것뿐인데 마음은 하늘을 날 수 있을 듯 가벼웠다. 오랜만에 술 한잔하고 싶었지만 운전을 해야 했기에 그럴 순 없었다. 내 옆에 아빠 엄마 동생이 함께 앉아서 저녁을 먹는다. 꿈만 같다. 지금쯤이면 아이들이 밥 먹는 모습을 보거나 야근을 하는 일상이었을 텐데 오늘의 일상은 특별하다. 한 숨 자고 바로 출근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너무 좋다.


아빠 : 요즘도 회사 일 많고?.

본인 : 이번 달은 조금 덜 바빴어.


밥을 먹으며 간단히 회사 생활에 대한 얘길 하고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얘기로 이어진다. 그리곤 나의 건강이나 아내와 잘 지내는지에 대한 얘기로 이어졌다. 늘 그렇지만 잘 지낸다고 얘기한다. 나도 엄마 아빠는 잘 지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물어본다. 시끌벅적한 대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 걱정과 고민이 한순간에 사라지게 만드는 우리 집이다. 한 시간 정도 저녁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아빠 : 쌀통은 여기 있고 족발 가져가라고 하나 더 샀어. 집에 가서 먹고 고구마도 가져가. 오늘 안 오면 아빠가 너네 집으로 가져다주려고 했지.

본인 : 어우 뭐가 이리 많아~. 고마워 맨날 받기만 하네.

엄마 : 얼마나 된다 그래 담엔 네가 사주면 되지.

동생 : 담에 또 오시오

본인 : 알게쓰~


지하 주차장까지 마중 나온 모습은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다.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어릴 적 마음이 되살아나는 시간이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북받친다. 친정은 우리 집과 상당히 가까워서 상대적으로 장인어른 장모님은 자주 뵙는다. 그런 모습이 나도 모르게 시샘이 났고 부러웠던 거다. 늘 보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아내와 의견 충돌이 있어 가지 못한 게 많다.


본인 : 덕분에 저녁 잘 먹었어. 담에 또 올게~.

엄마, 아빠 : 그래 조심히 잘 가고 또 와.


결혼 후 내 인생이 희생되며 쫓기듯 산다고 생각했다. 나를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고 속상하게 생각했다.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고 핑계를 댈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쫓기고 바쁘더라도 나를 위한 시간은 존재하고 마음을 나눠줄 수 있는 시간은 존재한다.


영원한 스승이자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너무 자랑스럽고 많이 생각난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엄마 아빠 그리고 내 동생. 오늘은 꿈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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